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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리가식 접문
(亞米利加式 接吻)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하였던가.


“그래서 그 단추를 누르면.”

“순식간에 훤해진다. 그 말이지.”

“그래.”

“도깨비불도 아니고.”

“내 말이!”


그 일견을 하지 못한다면 백문밖에는 답이 없었다.

원표가 아미리가에 다녀온 지도 벌써 며칠. 바쁘던 일정이 끝나고 완전히 홍규에게 시간을 할애해주는 날이었다. 짧은 시간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일은 있지만, 이렇게 판을 깔아놓고 푸는 날은 드디어 처음이었다.


“하. 상상이 안 되는데.”

“나도 말로 하자니 귀신이라도 보고 온 걸 얘기해주는 것 같네. 막상 보면 별 거 아니야.”

“별 거가 아니긴. 빛을 그렇게 쓸 수 있다면 다른 것도 가능하다는 이야기 아니겠나.”

"아 맞아. 사람을 옮기기도 했어."

"사람을? 아니 어떻게."

"아까 층층이 쌓인 처소에 묵었다는 이야기를 하였지."


원표가 커다란 관 같은 상자에 들어가 문을 닫고, 그대로 솟구쳐 머리 위에 있는 층으로 올라간 이야기를 하자, 홍규의 눈이 반짝였다. 도깨비짓만 하는 게 아니라 그런 일도 할 수 있다니, 정말이지 신세계가 아닐 수 없었다.


“…정말인가?”

“내가 거짓말을 왜 하겠나.”


홍규는 원표의 집에 와서 손님상으로 받은 저녁밥상이, 다과상이 되고 술상이 되었어도 아직 일어날 생각이 없었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직접 가지 못한 것이 아쉬워지지만, 그래도 직접 그 아미리가에 다녀온 벗이 이렇게 있어 들을 수 있어 상상이라도 해볼 수 있다는 것으로 좋은 일이었다.

홍규가 손에 든 잔을 홀짝였다. 포도로 만든 술이라는 게 이렇게도 되는 세계의 이야기를 들으며. 원표가 한 시진 전에 한 이야기를 또 하며, 꼭대기를 보자면 머리가 뒤로 넘어갈 정도로 높은 건물이 처소였다는 소리를 하는 것까지도 다시 들어도 재미있었다.


“자네는 참 기억력도 좋군.”

“기억도 그렇지만, 기록이지. 다들 뭐 하나 보고 오면 적어두기에 바빴으니.”


그리고 원표는 돌아온 이후 몇 번이고 그 기억을 되살려 주변인들에게 미국을 전하고 있었으니, 차마 잊을 새가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도시 안에 커다란 숲이 있는 것도 인상적이었지.”

“숲. 남산 같이 말인가?”

“아니. 산이나 언덕은 아니었어. 커다란 평지. 그것도 도시 한 가운데에….”

“필요한 일이군.”

“그렇지. 조금 사치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아. 내가 거기서 또 뭘 봤냐하면.”


원표가 웃으며 말하려다 입을 닫았다. 홍규는 술잔을 들어 그걸 마시려다가, 원표가 말을 끊었다는 걸 눈치챘다.


“뭘 봤는데.”

“아. 그러니까 교육제도를 자세히 봤는데….”

“무슨 숲에서 교육제도를 봤으려고.”

“밖에서 수업을 하는 걸 봤지.”

“수상한데.”

“하하하…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군.”

“뭔가.”


원표가 곤란한 듯 웃었다. 홍규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게… 거기서… 그걸 봤지. 아미리가식 접문.”


홍규가 낯선 단어에 미간을 구겼다.


“접문이면 접문이지. 아미리가식은 또 뭐야.”

“…그게 문젠가. 자네는.”


원표가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럼 뭐가 문젠데.”

“봤다고.”

“그러니까 아미리가식이.”

“숲 견학을 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남녀가 유별하지 못한 걸 봤단 말이야. 입을 맞추고 있는 걸.”

“그러니까-”


이제야 이해를 한 듯, 홍규가 말을 멈췄다. 벌건 대낮에 숲에서 남녀가 아미리가식 접문을 하고 있었다고. 여기에서 짚게 되는 곳은 둘이었다. 아미리가식이냐, 그걸 봤다는 것이냐.


“다른 사람들은 그걸 먼저 묻던데. 대낮에 밖에서 그게 가능한 거냐고.”

“…아. 그런가.”


홍규는 그래도, 아직도 백문을 다 하지 못했다.


“아미리가식이 그래서 뭔가.”

“…정말이지.”


홍규의 눈이 호기심이 어려 반짝거렸다. 원표는 고개를 약간 갸웃하고 웃었다. 정말이지 처음부터 변하지 않는 친구를.


<<<<


원표가 홍규를 처음 본 건, 아직 댕기머리를 달랑거리던 어린 날이었다. 원표는 그날 또한 분명히 기억한다. 기록하지도, 남에게 말하지도 않았지만, 언제나 눈을 감으면 선하게 떠오르는 날 중 하나였다. 가을 하늘이 높고 맑은 날이었다.

그런 날도 해는 기울었다. 파랗던 가을 하늘이 붉은 색으로 물들었다. 원표는 구름이 희고 붉게 빛나는 것을 보며 걸었다. 낮이 저녁으로 바뀌는 것을 보며.


“그런 게 옳으냔 말입니다!”


그런 날에, 그 뜨거운 목소리를 처음으로 들었다. 놀이도 잊고 그쪽을 쳐다보게 되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흉작입니다! 이 몇 년 사이 최고 흉작이요! 그런데 작년과 같이 하라고 하시니 이건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원표는 그 목소리를 향해 걸었다. 가을이라 다 익은 벼가 가득한 논길 사이로.

남자가 하나. 그리고 그 남자에게 소리치고 있는 아이가 하나. 또 그 아이 뒤로는 남자와 여자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었다. 그 무리는 서로는 소곤소곤 말을 하지만 남자에게 직접 말을 하지는 않았다. 겁을 먹은 얼굴로 남자의 눈치를 보듯 눈을 흘겼을 뿐이다.


“이 어린 새끼가 어디서 어른한테. 얘 부모가 누군가.”


남자가 무리들을 향해 물었다. 어느 하나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누구의 자식이든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마름이 틀린 셈을 하는데!”

“하, 참.”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


“안 되겠네. 자네들 다 아까 말한 거에서 한 말씩은 더 해오게.”

“나으리! 아이고 나으리!”


남자가 뒤를 돌자, 무리들이 부리나케 달려가 남자의 팔이며 옷깃을 잡고 동시에 사정을 했다. 저마다의 말들로 순식간에 논바닥이 시끄러워졌다.

송곳 꽂을 자기 땅도 없는 농민들. 지주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그 중 일정 부분을 지주에게 내는 것으로 그 값을 치렀다. 그런데 이렇게 흉년인 때에도 예년과 같은 양을 요구하면, 그만큼 부담이 되어 그것을 내고 난 뒤 정작 농사를 지은 쪽이 굶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토지를 관리하는 마름이 자기 멋대로 굴어, 소란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매년 있는 일이었다. 원표에게도 익숙한 광경 쪽에 가까웠다. 저렇게 사정을 하다가, 마름이 돌아가버리면, 사람들은 절망하지만, 포기한다. 곧. 하지만 지금처럼, 저렇게 이것이 말이 안 되는 일이라고 소리치는 아이가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 땅 주인이 누구입니까?”


아이가 말했다. 외치지는 않지만 커다란 목소리였다.


“누구이길래 이 흉작에 마름에게 그런 셈을 시킵니까?”

“셈이야 내가 하는 거지.”

“그렇게 놔두는 게 옳습니까? 농사짓는 자들이 이렇게 호소를 하는 게 옳습니까?”

“하, 이게 계속.”

“땅은 농사하는 사람에게 있어야 옳습니다! 그 땅을 모두 쥐고 방바닥을 차지하고 앉아, 피와 땀으로 만든 곡식 낟알이나 받아먹는 게 옳으냔 말입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마름이 손을 높이 올려 그걸 내리치기 직전, 원표가 물었다. 남자는 신경질 난다는 표정으로 돌아봤다가, 원표를 보고 표정이 변했다.


“도, 도련님.”


마름의 말에 무리들도 원표를 보고, 알아본 자들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모르는 자들은 원표가 누군가를 수군거리며 물었다. 그리고 앞다투어 이제는 원표에게 호소를 했다.


“아, 도련님! 원표 도련님이시군요!”

“도련님, 살려주십시오 원표 도련님! 흉년에 살 수가 없습니다요! 대감마님께! 한 말씀만 드려주십쇼 원표 도련님!”


이제는 마름도 원표에게 미적미적 다가와, 비굴한 웃음을 띠고 고개를 숙였다.


“도련님. 어쩐 일로 여기까지 다 나오셨습니까. 하하.”

“이게 무슨 소란인가?”

“어쩔 수 없습니다 도련님. 언제나 받는 만큼은 걷어야…. 대감마님과도 말씀이 된 일입니다.”


원표는 아이를 쳐다봤다. 이 소란에도, 아이는 양 주먹을 꾹 쥐고 꼿꼿이 땅에 박힌 듯 서있을 뿐이었다. 이쪽을 고요히 바라보며.


“아니네. 대감마님이 내게 따로 이야기를 하셨네. 흉년이라면서.”


원표가 유쾌하게 말을 꺼냈다. 원표로서는 심각할 일도, 지금 저 아이처럼 분노할 일도 아닌 일이었다. 그리고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큰 마름에게 낮춰 말하는 것도, 원표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올해 흉년이니, 곳간을 오히려 열어야겠다고. 조만간 말씀이 있으실 걸세.”


무리들 사이로 탄성이 터졌다. 감사하다며 머리를 조아리는 자도 있었고, 저들끼리 껴안는 자들도 있었다.


“자네는 이만 가 보게.”

“예, 예? 예….”


마름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먼저 자리를 떴다. 남자가 하나, 여자가 둘, 다시 남자가 하나. 차례차례 무리가 흩어져 원표만 남았다. 그때까지도 아이는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해가 거의 넘어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제 색을 잃고 그림자가 되어 일렁였다. 아이가 움직여 원표 앞에 섰다. 원표는 아이의 얼굴을 바라봤다. 여전히 눈이 맑았다.


“정말이냐?”


아이는 그 맑은 눈으로 원표를 보았다. 원표는 그 시선으로 꿰뚫어지는 것 같았다.


“방금 한 말. 정말이냐?”


원표가 대답이 없자 아이가 한 번 더 물었다. 원표는 숨을 들이켜고, 웃었다.


“내가 말씀드리면 돼. 여긴 어차피 아버지가 내게 주신 땅이니까.”


대감마님이 흉작 말씀을 하신 적은 없다. 하지만 이 근방 땅은 원표에게 준 땅이라, 원표가 올해는 흉작이니 내년에 더 받는 게 나을 것 같다며 설득하면 된다. 앞뒤가 바뀌었을 뿐, 마름 앞에서 한 말과 한 치도 다를 것이 없어질 것이다. 원표는 아버지에게 어떻게 말을 꺼낼지를 생각했다.


“그래.”


아이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뒤를 돌아 걸어갔다. 그 뒷모습이 그리는 그림자가 새빨갛게 선명했다.

원표는 그 그림자가 보이지 않게 되고 나서야, 아이의 이름도 묻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


“…홍규.”

“…….”

“자네. 홍규. 입은 좀 닫게.”


홍규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원표가 아미리가식 접문이라는 것을 조목조목 설명해주었고, 그 설명에 점점 입이 크게 벌어지더니, 이제는 다물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거짓말.”

“내가 왜.”

“농이 심하군.”

“아니 그러니까. 내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지 않나.”


원표가 즐거운 듯 웃었다. 홍규는 아주 심각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런 일을…. 대낮에. 다른 사람들이 다 있는 숲에서.”

“이제야 그걸. 그러니까 말이야. 우리도 저잣거리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 시대가 와야 한다고.”

“난 반댈세.”

“…반대인가.”

“그래.”


홍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숨까지 쉰다. 원표는 그것을 보고 웃었다. 정말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 수 있는 얼굴을 하고 있다.


“무슨 반대야. 자유지. 개인의 자유. 개인이 원한다면 어디에서든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범죄가 아닌 이상에야.”

“아니… 그래도 그런 걸!”

“그런 거라니. 말이 너무 심하지 않은가. 애정을 표현하는 거지 망측한 일은 아니야.”

“그게! 그게 어떻게 망측한 일이 아닌가!”

“아 그게. 직접 보면 그렇게 심한 건 아니라. 물론 그냥 입술만 부딪치는 건 아니라…”

“됐네! 설명은 이제!”


홍규가 술잔을 집어 입에 탁 털어 넣고는, 딱 소리가 나게 술상에 내려놓았다. 숨길 수 없는 귀끝이 빨갛다. 원표는 그게 즐겁다는 듯 웃었다. 홍규가 그걸 눈치 채고 째려보기 전까지는.


“한 번 해보게 그럼.”

“뭐?”

“나한테 해보라고.”

“…해 봐.”

“자.”

“아니.”

“자. 어서.”


앉은 자리에서 술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했던 자리였다. 홍규가 원표에게 바싹 다가와 붙자, 그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진다. 원표는 슬금 엉덩이를 빼며 뒤로 물러났다.


“왜 이러나. 취했나?”

“아니. 안 취했네. 그러니까 그 아미리가식 그거. 해보란 말이야. 그럼 알겠지 나도.”

“취했네.”

“초콜릿, 와인, 치즈. 묘미. 먹어보니 나도 다 알지 않았나.”


원표가 그 주전부리의 묘미까지도 말로 설명해줬던 때가 있었다. 향기로운 포도술과, 소의 젖으로 만든 희한한 맛의 고형물. 홍규는 그게 뭐가 맛있겠냐는 듯 버티다가, 원표가 공수해온 것들을 먹고 나서야 인정을 했었다. 더럽게 맛있다고.


“자.”


홍규의 맑은 눈이 원표의 코앞까지 와서 반짝인다. 또렷하게, 절대로 시선을 피하지 않고, 끝까지 마주보는 눈.


“…눈.”


그 눈동자가 눈꺼풀에 가려졌다가 나타날 때마다, 원표는 있지도 않은 술기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눈은 감아야지.”

“왜 감아야 되나.”

“……감아. 빨리.”


홍규는 그 말에 순순히 눈을 감았다.


“자. 해봐 빨리.”


낭만이라고는 없는 재촉을 하며.


<<


북촌 사랑방은 소문이 무성했다. 개화를 이야기하고 새 시대를 논하고자 하는 자들이 편안히 교류할 수 있는 자리라고.

원표가 그 자리를 찾은 것은, 그 소문을 듣고 몇날며칠을 잠도 자지 못하고, 친지에게, 지인에게, 지인의 지인에게, 지인의 친구의 친지에게 수소문하던 끝에 날을 잡은 어느 여름날이었다. 각을 잡아 준비해둔 양복을 입고, 오랜 날을 기다려 구했던 안경도 걸쳤다. 흰 셔츠에 갖춰 입은 정장이 단정했고, 콧잔등에 얹은 금속 안경테가 청량했다.


“…어.”


그리고 그 자리에서, 잊을 수 없던 얼굴을 만났다.


“아는 사람인가?”

“…그렇다고… 해야 하나.”


원표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웃음이 번졌다.


“그래? 저 사람은… 아! 아 오셨습니까 선생님.”


원표를 데리고 온 자가 원표를 혼자 남기고 자리를 떴다. 원표는 그러고도 한참을, 그 자리에 박힌 듯 서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보이는 것을 본다. 단정한 흰 셔츠. 집중한 미간. 신중한 손가락. 옆선으로 보이는 흰 얼굴에 내리깐 눈도 단정했다.

말이 사랑방이었지 웬만한 민가 하나 정도의 규모도 되는 별채였다. 대청마루를 가운데에 두고, 문 여러 개가 저마다의 토론의 장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청마루에서, 그 어느 방에도 들어가지 않은 자가, 작은 상을 끼고 종이와 연필을 거느리고 있었다. 트인 곳으로 바람이 불자 종이가 우수수 부풀었다가 꺼졌다.

그 중 한 장이, 대청마루 도입에 선 원표에게 날아들었다. 원표는 그것을 집어 들어, 읽었다. 특이한 필체로 글씨가 가득했다. 어떤 글인지 알고는 웃음이 터졌다. 정말이지 변하지 않는 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웃음이 터진 얼굴로, 그 글을 쓴 자와 눈이 마주쳤다. 절대로 잊지 않았던 그 눈빛이었다.


“법국의 그 글 같은데, 맞습니까.”


그 글이 어떤 것인지 말하자, 날카롭던 눈빛에 그나마 호의가 깃들었다. 원표는 천천히 신발을 벗고 대청마루로 올랐다. 그리고 종이를 잔뜩 두른 그의 곁에 앉아, 주운 종이를 건넸다.


“네. 좋아하는 글입니다.”

“그러신 것 같습니다.”


원표는 잔뜩 늘어진 종이를 쳐다보며 말했다. 어느 종이에든 비슷하고도 특이한 필체가, 같은 구절로 가득했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100년 전 쯤에 법국에서 선언된 글이다. 자유와, 평등, 그리고. 원표가 기억을 더듬으며 종이를 눈으로 훑고 있을 때, 남자가 말을 이었다.


“우리도 어서 이런 게 있어야 됩니다.”

“…하지만 여기에… 아마.”

“세 번째. 그것도 물론 빼서는 안 되고요.”


원표는 세 번째 항을 확인했다. 역시 잊지 않고 있었다. 모든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취지의 문장이다.


“범상을 논하시는 겁니까.”

“논하면 안 됩니까?”


원표는 웃었다. 기억대로의 사람이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이 자는 기억을 하고 있을지.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기까지, 이따금 석양을 마주하게 될 때마다 궁금해졌었다.


“여기는 처음이신 것 같습니다.”


남자가 말을 이었다. 원표가 기억하는 것보다도 훨씬 낮고 무게가 실린 목소리였다. 보지 못하던 시간 동안 변성기를 겪고, 또 저마다의 시간을 겪으며 자랐기 때문이다. 원표는 그 시간이 아득해졌다. 그래서 남자를, 그 등 뒤로 흐드러지는 버드나무잎까지를 다 담은 풍경을 보다가, 그제야 대답을 했다.


“예. 드디어 오게 되었습니다.”


원표가 웃었다. 의미심장하게 넣은 단어를 혼자서 부끄러워하면서도 그런 티는 내지 않으려 했다.


“안경 쓴 것도 제법 잘 어울리십니다. 원표 도련님.”

“네. 하하. …네?”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마침 내리쬔 햇빛이 눈이 부셨다. 원표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저는 홍규입니다.”

“…홍규.”


원표가 처음으로 그 이름을 입에 담으며, 웃었다. 투명한 눈으로 자기를 마주하는 그를, 홍규를 마주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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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표는 홍규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이 얼굴이 순순히 눈을 감고 눈앞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건 정말이지 모처럼 있는 일이다. 내리 깐 눈 아래로 보이는 속눈썹을, 굳게 닫힌 채인 입술을, 단단해 보이는 볼을 살핀다.


“어서.”


낮고 짧은 일갈은 언제나 들을 수 있는 목소리였다.


“하여간 고집도.”

“빨리.”

“아니 내가 무슨 세계체험관 직원인가?”

“자네와 사귀는 재미가 이런 거 말고 뭐가 있어.”

“하, 정말.”


원표가 홍규에게 바짝 다가가 앉았다. 숨이 서로 섞일 만큼까지. 심호흡을 하고 크게 날숨을 내쉬자, 홍규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원표가 그걸 보고 다시 웃었다.

얼굴이 가까이. 그리고 입술은 더 가까이. 원표가 홍규의 입술에 입술을 맞댔다. 그러면서 귀가 순식간에 달아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입술로 느껴지는 입술의 온기도. 그리고 가볍게 쪽 소리가 나며 입술이 떨어진다. 곱슬거리는 앞머리 밑으로, 원표의 눈이 질끈 감긴다. 


“뭐야. 별 거 아니-”


그 짧은 사이에 홍규가 말을 하는 것에, 원표는 그 말을 막으며 계속했다. 아미리가식 접문을.

이제는 입술이 벌려진 채로 겹쳐지고, 부드러운 입안의 속살이 서로 닿는다. 홍규가 숨을 들이쉬었다. 원표는 계속했다. 고개를 틀어 다른 방향으로 입술과 입술을 겹친다. 홍규의 숨이 멈췄다. 원표가 웃었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홍규가 원표의 어깨를 잡았다. 밀지도, 잡아당기지도 못한 채로. 원표는 홍규의 허리를 감싸 안는다. 역시 당겨 안지도, 그렇다고 내치지도 않으면서. 아직도 얽혀있는 두 사람이, 조금씩 홍규의 등 뒤 벽으로 밀린다. 아주 잠깐 사이에 벽에 홍규의 뒤통수가 닿고, 이제는 더 뒷걸음칠 공간조차 남지 않았다.

홍규가 숨을 참았던 상태에서, 더 크게 숨을 들이쉰다. 아까 분명 이게 어떤 것인지 듣고 경악을 했던 기억이 있는데, 실제로 그런 일을 겪는 것은 과연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원표가 다시 고개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며 더 깊숙하게 파고들었을 때, 홍규는 이제는 온몸이 굳었다. 원표의 어깨를 잡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손톱 부분이 새하얗게 핏기가 빠진다.

원표는 그런 홍규를 알았다. 그래서 멈춰야 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일부러 느리게, 아까 했던 설명대로 차근차근 이어나간다.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입술이 살짝 떨어질 때마다 홍규의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홍규가 원표를 잡은 손이 힘이 들어가 부들부들 떨렸지만, 뱉은 말이 있어 피하지도 못했다. 그만하라는 말을 하지도 못했지만, 원표는 그걸 다 들으며 속으로 웃었다.

겨우 입술이 완전히 떨어졌다. 원표가 다 떨어지고 나서도 홍규는 눈도 뜨지 못하고 힘을 꽉 주고 있었다.


“어떤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홍규가 숨을 내쉬었다.


“하….”


홍규는 눈을 뜨고도 원표를 제대로 바라보지를 못했다. 이제는 목까지 빨개져서는 헛기침을 했다. 손등까지 덮인 소매 밑으로 손가락이 계속 헛돈다.


“…장난이. 진짜.”

“나를 좀 믿어, 이 사람아.”


원표는 자기 볼도 달아올라있던 걸 느끼고, 역시 헛기침을 했다. 두 사람은 방이 갑자기 더웠다.


“과연 신세계군. 이 정도의 애정 표현을 저잣거리에서 할 수 있다면… 좋을 수도 있겠군. 좋겠어. 반대… 나는 안 하겠지만. 아니….”


홍규가 드물게 횡설수설했다. 


“그래. 누구든 어디에서든 애정을 표현할 수 있다니 대단한 일 아닌가.”

“그래 그래. 다음에 사랑하는 사람 생기면 해줘보게.”


그 횡설수설 속에서도, 원표를 모르는 건 변함이 없었다.


“…그래.”


원표가 웃었다. 아주 잠깐을.


“그래 다음은. 또 뭘 보고 왔나?”


홍규가 물었다. 여전히 맑은 눈으로. 방금까지 아미리가식씩이나 되던 접문을 해보던 입으로.


“…어떻게 매혹되지 않을 수 있겠어.”

“응?”


원표는 다시, 웃었다. 갑자기 무슨 말이냐는 말을, 또 무언가 듣고 싶은 마음에 삼키고 있는 친구에게.


“아니, 아미리가가…. 그래. 교육제도가 말인데.”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그도 역시,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은, 오늘도 삼킨 채로.

Sœur Moniq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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