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Это станция Владивосток···. 열차의 안내 방송은 언제나 단조롭다. 서도는 잠시 눈을 감았다. 블라디보스톡 도착을 알리는 음성은 아주, 익숙하다가도 어쩐지 생경했다. 아라삿말(*러시아어)은 항상 서도에게 그랬다. 어떨 때에는 고향의 언어처럼 친근하면서도 창호지를 뚫고 들어오는 겨우내 한낮 바람처럼 서늘하기도 했고. 하지만 이번에도 눈을 감고 싶어진 이유는 아라삿말과 아라사(*러시아)에 대한 권태는 아니었다. 아마도, 그러고팠던 이유는···.

 

열차 문이 열릴 때에는 참 둔한 소리가 났다.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처음 아라사에 왔을 때에도 다시 조선땅에 돌아올 때에도 서도의 귀를 때리는 이 소리 역시 아주 익다. 서도는 열차 안내원 여성이 안녕히 가시라며 산드러지는 인사를 건네고 나서야 이내 눈을 떴고, 인사를 겸해 가볍게 목례했다.

역사에 발을 딛자마자 한창 얼어붙는 이 땅 아라사의 시린 바람이 얼굴살을 애는 것만 같았다. 시비리(*시베리아)에서부터 부는 바람이라지. 아주 오래 전, 지금보다 두 뼘쯤 작았을 시절 아버지께 들었던 것이 어렴풋이 생각 났다. 아버지. 그럼 시비리는 어디예요? 두 뼘이나 작았던 서도가 다시 한 번 묻자, 서도의 아버지는 웃으며 시비리, 꿈 같은 설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이야기로만 들은 시비리는 한여름에도 조선의 동짓날처럼 무서운 바람이 불었으나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얗기만 했으며 구름도 한 점 없어 무구하게 푸르른 하늘에 밤이면 무지개가 떴다. 조선에서 진달래가 피고 단풍이 질 동안에도 내내 겨울, 그리고 밤에 뜨는 무지개. 들은 이야기는 마냥 동화 같았다. 그래서 어린 날의 서도, 당시에 윤이었던 아이는 꼭 시비리에 가고 싶어 했다. 한 번도 겪지 못한 추위를 제 살갗으로 느껴보고 싶었고 눈이 아득해질 것 같은 눈밭을 뛰어보고도 싶었다. 한 번은 아버지께 졸라도 보았으나 아라사 땅은 조선 땅보다 몇 백 척 몇 천 리는 커서 그럴 수 없다는 대답을 들은 후로는 가슴 안에 담아두기만 했다. 두 뼘이 크고 더 이상 윤으로 불리지 않을 즈음에는 시비리라는 곳조차도 영영 잊을 뻔 했다. 하지만 당장 아라사 땅에 발을 딛자마자 떠오른 것은 무엇도 아닌, 어릴 적 품었던 시비리라는 미지의 설원에 대한 꿈이었다. 이제 더 이상 시비리에는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곳에서 불어온다는 바람만큼은 지금도 달가웠다. 아라사에 다시금 발을 딛게 되었다는 실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혁명의 선포이기도 했다. 혁명의 바람, 혁명의 두근거림······.앞으로 자신과 조국의 미래에 어떠한 일이 생길지는 서도 본인도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서도는 자신을 던져보고 싶었다. 겪지 못한 뜨거운 삶을 살갗으로 느끼기 위해서, 아득해질지라도 백성과 조국을 위하여.

 

아라사 서간문 - 온

 

아라사에 도착한 직후 서도는 한동안 숨죽이고 살아야만 했다. 이번에 아라사에 도달한 것은 양반집 규수의 입장이 아닌, 독립운동의 명분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동시에 아주 바빴다. 그럼에도 서도는 모든 일을 잘 해냈다. 아마 원표가 곁에 있었다면 역시 서도라며 치켜 세웠을 것이고 홍규라면 원표처럼 호들갑을 떨진 않더라도 무심하게 고갤 끄덕여줬을 것이다. 처음 파씨오네를 알게 한 친구들은 더 이상 곁에 없었으나 정신적 지주는 분명 되어 주었다. 서도는 숨 돌릴 틈도 없는 하루들을 보내는 동안에도 그런 생각을 했고 가끔은 그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들을 홀로 속삭이기도 했다. 홍규, 너는 여전히 피 웅덩이 한복판에 서있을 어린아이 생각을 할까. 그, 눈이 빛나는 아이 말야. 끌어안은 말들이 많아 터져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서도는 이런 행동을 할 때에는 누구보다 묵묵했고 혹은 경건했다. 서도가 스스로의 말동무를 자처한 것은 얼 것 같은 바람만큼이나 가슴 시리게 하는 땅에서의 유일한 위로이며 외로움을 달랠 묘안이었다. 서도가 지내는 곳은 어릴 적 그녀가 상상한 시비리만큼 눈이 함빡 내리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서도를 슬프게 했기 때문이다. 간혹 이 우울이 향수인지 빼앗긴 나라에 대한 것인지 헷갈리기도 했다. 물론 결국엔 어느 쪽이든 상관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전부 그녀가 조선을 그리워한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서도의 혼잣말들은 기어코 문장이 됐다. 처음에는 홍규, 아니면 다른 친구나 동지들에게 전하려던 서신 같은 혼잣말들이나 서도는 정신 없는 타지 생활을 하면서도 틈을 내어 흩뿌려진 음절들을 모아 글로 썼다. 사실 기록에 그칠 뿐이다. 어떤 소설들처럼 낭만적이거나 황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낭만조차 꿈꾸기에 버거운 시대의 기록이었다. 수신인은 분멸했으나 전달되지 않는 문장과 단어들···. 하지만 이내 생각한다. 이 수기는 분명 나의 열혈한 동료들에게 바치나 수신인은 그들이 아닌··· 훗날의 사람들로 해야 할 것이라고, 그러고 싶다고, 그래야만 할 것이라고···. 홍규는 후회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훗날 있을 그들의 조롱은 거슬리지도 않는다고 말했으나 서도가 수신인을 하필 그들로 설정한 것은 동정이나 비웃음을 사겠다는 의미는 되지 않았다. 서도는 조금 더 호소에 가까운 글을 썼다. 왜 당신들의 선대가 성급하고도 무모한 꿈을 꿀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그 과정에서 서도는 기록들의 제목이 될 만한 이름을 찾았다. 서간문. 짧고 단호한 음절이나 정체성으로는 아주 적절했다. 처음부터 서도의 말들은 서신과 같았으니 말이다. 찰나의 진심들을 고스란히 단어와 문장으로 간직하게 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말로 그치는 것보다 나은 일이었다. 찰나의 진심, 간직하거나 전하고 싶은 순간들···. 그리고 홍규에게.

그리고 홍규의 생각을 했다. 여전히 전할 말들은 산더미다. 서도는 떠오르는 문장들을 남김 없이 종이에 옮겨 적었다. 홍, 규, 에, 게···. 아득한 음절들을 삼키며 쏟아내듯이 문장을 적고 나서야 서도는 눈을 감았다. 몰려오는 생각들 탓이었다. 고갈되어서 더 이상 언어로 정리할 수 없는 감정들이 엉키고 설기는 기분이었다. 떠나온 조국의 생각을 하면 그랬고 열혈하게 사랑한 동지들을 생각하면 그랬다. 사랑하는 것들은 항상 사람을 안달 나게 한다. 서도가 사랑한 것들은 자꾸만 그녀를 슬프게 한다. 아라사 행 기차에서 눈을 질끈 감은 것도 그런 이유였다. 서도는 여전히 이런 생각을 한다. 사람의 진심이 문제라면. 이건 기록에 적히지 않은 문장이다. 하지만 이 말만이 홍규에게 가장 닿길 바란 말인 동시에 가장 완전하게 닿은 말임을 서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가끔씩은 이런 문장도 쓰여 있던 것 같다. 홍규에게, 당신이 아주 그리워.

 

집필은 철이 한 번 바뀐 후에도 끝나지 않았다. 어쩌면 서도가 생을 다하기 전까지는 계속 쓰여질지도 모르는 글이다. 전하고 싶고 해야 할 말들은 아직도 쏟아질 것만 같았다. 온전히 살아있는 자신에 대한 기록이자 기억 속에 사는 홍규에게 바칠 서신, ···그리고 하필이면 이 시대에 태어난 이들이 바꿔 놓았을 훗날을 수신인으로 한 편지. 서도는 홍규가 바랐고 자신이 원했을 미래가 꾸며지려면 얼마나 많은 피가 필요할지 가늠해보았다. 분명 피바람이 일 것이다. 게다가 서도는 이미 피바람을 맡아본 적이 있었다. 삼일천하, 왕비의 최측근에서 개혁을 꿈꾸고···. 어쩌면 타협을 꿈꿨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 역시 이제는 모든 걸 불사르더라도 두렵지 않았다. 혁명, 해방, 평등과 자유, 그런 것들 것 위해서. 무수한 피를 그녀 혼자 가늠할 수는 없었으나 적어도 그 피바람 앞에서 다시는 굽히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것이다. 서도는 계속 써내려 간다. 그래서 나도 그 피바람에 일조하려 한다. 홍규, 이제는 내가 혁명의 바람에 으스러져 죽을 그 미래가 고대되기까지 해. 힘을 주어 눌러 쓴 문장은 어떠한 진심보다도 훨씬 진심이다. 그리고, 또··· 견고한 각오의 의미가 되기도 했다. 서도는 분명 말하고 있었다. 뜨겁게 바치리라고. 그리고 이제 서도는 이 서간문에 온점 찍을 날을 꿈꾼다. 모종의 기대라면 기대였다. 홍규가 말했던, 광장 한가운데 서있을 눈이 반짝이는 아일 만날 날을 고대하며. 비로소 서도의 모든 호소에 종지부를 찍는 날일테고 서도와 그녀가 그토록 애타게 사랑한 이들이 바랄 미래이며, 기어이 도달한 봄일 것이다. 그날을 위해 서도는···

서도는 핏빛 잉크로 써내려 간다.

Sœur Moniq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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