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곡 – 세아(@181009_), 온예진 페어 기반
춤곡은, 춤을 추는 곡이지. 음악에 맞춰, 함께 발을 내딛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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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규는 서도의, 심지어는 원표의 서무실도 아니고 다 쓰러져가는 자신의 집으로 날아온 갑작스러운 서신에 그만 한 입도 채 먹지 못한 보리 주먹밥을 바닥에 떨궈버릴 뻔했다. 체전부가 아니라 그 집에서 삯을 받고 일하는 계집아이가 왔다는 사실에 홍규는 알 수 없이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지만, 그보다 더 큰 긴장감이 온몸을 휘감고 있었기에 그를 특별히 자각하지는 못했다.
윤이 아씨가 갖다주래요. 열댓 살도 되지 않아 뵈는 아이는 서신을 홍규의 손에 억지로 쥐여주고는 쌩하니 뒤돌아 가버렸다. 홍규는 겉봉에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거사에 관한 내용일 것이라 구할(九割) 정도 확신하였다. 사실 그것 말고는 용건이 없는 사이라고 더더욱 확신하고 있기 때문도 있었다. 그 누구도 곁에 있을 리 없음에도 굳이 주변을 살핀 홍규는 구석에 자리잡았다. 서찰에는 정갈한 글씨가 몇 자 적혀 있었다.
‘내일 축정시 서소문 아래 홑대문, 서찰을 준 아이에게 윤이 불러 왔다고 하면 열어줄 거야.’
이어지는 말로 말미암아 앞에 적힌 홑대문 집은 분명 서도의 집, 정확히는 서도의 아비가 있는 집일 것이었다. 그런데, 나를 왜? 서도는 보통 원표를 통하여 이야기를 전했다. 더구나 홍규가 앞뒤 가리지 않고 중궁전으로 뛰어 들어간 이후로는 더더욱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서도였다. 그가 어디로 튈지 모른다고 여긴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리 늦은 시간에, 내게만 긴밀히 털어놓을 이야기가 있는가? 아무리 골똘히 생각해도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그러나 어차피 한배를 타기로 한 마당에 구태여 의심을 드러낼 필요는 없겠다고 자신을 다독였다.
축시까지는 아직 여섯 시간 정도 남았다. 그날도 역시 물자 수송으로 피곤을 면치 못한 터라 마음만 먹으면 짧게 눈이라도 붙일 시간이 되었지만, 홍규는 마냥 자리에 앉아있을 수 없어 겉옷을 주워 입고 집을 나섰다.
“아씨 부탁이라 갖다주긴 했는데, 왜 그런 놈하고 어울리신대요?”
“그런 놈이라니?”
서도는 발뒤꿈치를 들고 높이 위치한 서재의 창문을 열다 되물었다. 라희는 구석에 한가득 쌓인 책에 먼지를 떨어내며 눈을 굴렸다. 분명 상전의 목소리에는 의아함 말고 그 어떤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지만, 자신이 말실수를 한 것인가 곱씹었다.
“영 눈빛이, 그리고 상한이람서요.”
“혁명가의 눈빛이지?”
“예에?”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서도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희는 상전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낯으로 멀뚱히 서 있다가 바닥을 쓸었다. 편견을 특별히 갖지 않는 분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거칠고 과격한 상한들과 어울리시는 걸 대감마님께서 아시기라도 하는 날에는… 라희는 고개를 내저으며 생각을 떨쳐냈다. 그런 일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남사스러운 질문을 하고 싶었으나, 말 그대로 남사스러운 탓에 그저 꿀떡 삼키기만 했다.
“묻고 싶은 건 조금만 참으렴.”
“그러잖아도 그러고 있어요.”
“착하다.”
똑똑. 대문 근처에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귀가 밝은 라희는 곧장 마당으로 달려 나가 문 너머로 외쳤다.
“뉘셔요?”
“…….”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라희는 문틈으로 방문객의 신원을 확인하고자 했다. 그러다 안을 들여다보는 눈과 마주쳐 에그머니나, 하며 뒤로 넘어갔다. 서도는 라희의 어깨를 붙잡아 받아내고는 문을 벌컥 열었다. 홍규가 어색하게 서 있었다. 그는 눈을 내리깔고 시선 둘 곳을 찾다 못해 서도를 바라보았다. 서도는 옅게 웃으며 라희를 곧장 부엌으로 보내고 홍규를 안으로 초대했다. 홍규는 문턱 너머에 서 있는 서도를 바라보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들어가야 하나?”
“그럼 여기 서 있으려고?”
“용건이.”
“일단 들어가서.”
짧은 말이 오가는 사이가 길었다. 서도는 더는 그를 밖에 세워둘 수가 없어 마지못해 손을 잡아당겼다. 홍규는 파드득 놀라며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마당에 멀뚱히 서 있는 홍규를 보던 서도는 서재를 가리키며 말했다. 책 많은데. 그제야 홍규의 두 눈에 빛이 돌아왔다. 서도는 작게 소리내어 웃고는 좀 전까지 실컷 청소해둔 서재로 홍규를 데리고 들어갔다.
작지 않은 양옥. 홍규는 서도의 뒤를 조용히 따르며 주변을 살폈다.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서양의 물건들, 빽빽하게 꽂힌 책, 아름답게 장식된 찬장, 고급스러운 향기…… 자신의 처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분명 이어 걷는 두 사람의 거리는 일 척도 되지 않았으나, 십 리 길보다 멀게 느껴졌다. 일부러 속도를 줄여 걸었다. 차라리 이몸의 선택이라면. 홍규는 고개를 외로 돌려 서도의 뒷모습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앞서가던 서도는 서재의 문을 열고 들어가 작은 호롱을 켰다. 달빛 하나 들지 않던 방이 금세 밝아졌다. 홍규는 문턱을 넘지 않고 다시 물었다.
“용건은.”
서도는 홍규의 어깨 너머를 살피고는 조용히 운을 뗐다. 그가 좋아하기는커녕 화내지나 않기를 바랄 뿐이었지만.
“춤곡. 궁금하다며.”
서도의 입에서 나오는 의외의 말에 홍규는 미간을 좁혔다. 당연히 거사에 관한 일일 줄 알았는데. 그는 열이 오르는 양뺨이 속에서 올라오는 울화 때문일 거라고 굳게 믿었다.
“지금 한가하게 음악 따위나 논하자는 거야?”
“어차피 잠들어 있을 시간을 잠시 빌려서 하자는 거지.”
“가겠어.”
“춤곡은 춤을 추는 곡이야.”
문고리를 붙잡으려던 홍규는 서도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호기심이 동하는 것도 같았다. 서도는 일부러 말을 빠르게 이었다.
“음악에 맞춰서 같이 발을 내딛는 거지.”
“같이?”
“박자가 있으니까.”
“…흐름인가.”
“그렇다고도 볼 수 있어.”
서도는 곧 생각에 잠기는 홍규의 표정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연주자들을 부를 수는 없어서 들려주진 못하지만,”
서도는 조심스럽게 홍규에게 한발 다가섰다. 홍규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뒷걸음질 쳤다. 서도는 홍규의 뒤쪽에 있는 붉은빛의 책 한 권을 꺼내어 펼쳤다. 홍규는 표지를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서도는 그 표정에 흘리듯 웃으며 책 속에 있는 삽화를 가리켰다. 마리안느와 피에르가 함께 서로를 끌어안고 춤을 추는, 무도회 그림.
“같이 할 수는 있어.”
“뭐를.”
“춤.”
이걸 하자고? 홍규의 얼굴에 금세 당황스러운 기색이 깃들었다. 서도는 잠시 망설이다 그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고개를 바짝 숙인 채 제게 내밀어진 손을 물끄러미 보던 홍규는 서도의 눈치를 살폈다. 서도는 홍규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제 어깨 위에 올리고 나머지 손은 마주 잡도록 했다. 홍규의 허리를 손끝으로 살짝 감쌌다. 홍규는 뒤로 물러섰다. 손은, 놓지 않았다.
“…귀족들의 춤은 원래 다 이런가?”
“어떤데?”
“잔인해.”
“잔인하다고?”
“남사스럽고.”
알만하다. 서도는 손을 마저 놓으며 고개를 숙였다. 왠지 맴도는 공기가 변명을 종용하는 것 같아 작게 중얼거렸다.
“어떤 건지 궁금하대서.”
“……기억력도 좋네.”
“그럼.”
서도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웃자 홍규는 시선을 외로 돌렸다. 서도는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 입을 열었다.
“고맙다는 말 하고 싶었어. 숨겨줘서.”
홍규는 애써 두 사람 사이에 꺼내놓지 않았던 달빛 아래 그날 밤의 일을 서도가 먼저 꺼낸 것에 적지 않게 놀란 눈이었다. 서도는 그때와 달리, 흔들림 없는 눈이었다.
군란은 들불처럼 일어나 순식간에 궐을 집어삼켰다. 분노한 관군은 당장에 중전을 끌어내라며 담을 넘고, 사람을 사로잡았다. 민 씨의 최측근조차도 도망칠 길도 잃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중전은 무예별감 홍재희의 등에 업혀 무사히 궐을 빠져나갔지만, 남겨진 이들의 수는 헤아리기 어려웠다. 서도 역시 그 가운데에 있었다.
두려움이 엄습했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비명과 총칼의 충돌, 곧 들이닥칠 시퍼런 눈빛들. 아무리 중전의 최측근이고, 그가 아끼는 사람이라 해도. 그 누구도 자신을 숨겨주는 이는 없었다. 나 자신만이 나를 구할 수 있다. 서도는 집옥재 근방으로 달려가 북쪽 담장 아래에 겨우 몸을 숨겨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흙바닥을 헤집는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입술이 마르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 같았다. 양손으로 입을 막고, 달빛이 이곳을 비추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성큼성큼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림자가 보였다. 차라리, 이미 내가 죽은 사람이었다면. 그랬다면 이런 두려움조차 날 어쩌지 못할 텐데. 서도는 눈을 질끈 감고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이봐요.”
낮은 음성, 부드러운 어조. 서도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저를 부른 이를 올려다보았다. 처음 보는 사내였다. 옷차림이 관군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렇다고 궐에 있을 만한 인물도 아닌 것 같았다. 아마 잡다한 물자를 대기 위해 드나드는 상한 즈음이지 않을까, 짧은 순간에 미루어 짐작해보았다.
서도는 여전히 몸을 잔뜩 움츠린 채로 그가 뒷말을 이어주길 기다렸다. 사내는 주변을 살피더니 작게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신무문으로 나가면 됩니다.”
서도는 금세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사내의 시선이 잠시 흔들리는 것 같았지만, 곧 북문으로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달빛 아래, 숨 가쁜 첫 만남이었다.
“사람 살리는 일인데.”
홍규는 무심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행동에 서도는 기쁜 마음을 내비쳤다.
“그러니까. 나를 그저 사람으로 봐줘서 고맙다고.”
“…만민평등.”
“그건 대의명분의 구호라니까.”
서도는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홍규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는 곧 책상 위에 펼쳐진 책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 끝을 따라가던 서도는 최대한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아직도 레옹이 싫어?”
“두렵지.”
“죽음이?”
홍규의 눈동자가 곧 서도를 향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Passione, 서도가 작게 중얼거렸다. 홍규의 표정이 굳었다.
“외국말 하지 마.”
“열혈 개화당원이라던데, 친구 말로는.”
“그래, 그렇게만 알고 있어.”
“뜨거운 피는 온몸에 흐르는 거야.”
무슨 뜻이야? 홍규의 물음에 서도는 그저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 뿐이었다.
“글쎄.”
“놀려?”
“당하지도 않았잖아.”
“바보가 되는 기분이야.”
“궁금한 게 또 있으면 물어봐. 오늘처럼 알려줄게.”
그제야 조금, 그를 알 것도 같았다. 홍규는 아해를 대하는 것 같은 서도의 행동에 미간을 좁혔다. 서도는 생글생글 웃을 뿐이었다. 홍규는 한숨을 푹 쉬더니 여태껏 흉터가 남아있는 손바닥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당신은 궁금한 거 없어?”
의외의 물음에 서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많지만. 대답해줄 거야?”
“할 수 있는 대답이면. …많지는 않겠지만.”
“당신.”
“홍규라고 했잖아.”
“말고.”
서도는 홍규를 향해 한발 다가섰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홍규는 뒤로 물러섰다가 다시,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또, 뭐?”
“됐어, 나중에.”
“나중에 언제.”
홍규의 물음이 잠시 비난처럼 들렸다. 우리 주제에 나중을 기약하는 거냐고, 정말 나중이 있을 것 같냐고. 서도는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혁명이 성공하면.”
“그때도 할 수 없는 대답이면.”
“할 수 있을 때.”
홍규는 서도의 눈동자를 깊숙이 들여다보다 시선을 창문 밖으로 돌려버렸다. 어스름한 빛이 산 너머에서부터 비추고 있었다. 갈래. 서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문고리를 잡았다.